'무용지물' 상가임대차보호법
#1. 지난 25일 인천광역시 계양구 작전동의 한 상가 건물 1층 음식점에서 방화 소동이 벌어졌다. 이 음식점 업주 A(56.여)씨가 바닥에 석유를 뿌린 뒤 불을 지르겠다며 위협한 것이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과 7시간 대치 끝에 붙잡힌 A씨는 왜 이런 소동을 벌였을까.
지난 2011년 이 건물에 식당을 낸 A씨는 보증금 6000만원에 월세로 660만원을 내 왔다. 시설투자비로 1억5000만원까지 전재산을 투자한 그는 그러나 불황으로 장사가 시원치 않아 고민해왔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점포가 경매에 넘어가 주인이 바뀌면서 시설투자비는 고사하고 보증금까지 떼일 위기에 처했다. A씨가 임대한 점포의 환산보증금(보증금+<;월세×100>;)이 7억2000만원으로 수도권 과밀억제권역인 인천의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 적용 한도를 크게 웃돌았기 때문이다.
속수무책으로 내쫓길 위기에 처한 A씨는 보증금이라도 돌려받으려고 새 건물주에게 사정했다. 그러나 이사비용 500만원 이외에는 내줄 수 없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결국 분통이 터진 A씨는 극단적인 수단까지 동원하다 범죄자가 되고 말았다.
#2. 자본금 1억원으로 지난해 서울시내 한 상가에 음식점을 창업한 B씨.
보증금 5000만원에 월세 300만원짜리 점포를 임대하고, 집기 구매와 인테리어에 5000만원을 투자했다. 그러나 건물 주인이 아들에게 점포를 내주겠다며 가게를 비워줄 것을 요구하면서 B씨는 당장 거리로 나앉게 됐다.
권리금과 시설투자비를 날리게 된 B씨는 집주인이 보증금 5000만원도 주지 않을까봐 전전긍긍이다. B씨의 환산보증금이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 적용 대상인 3억원을 넘기 때문이다.
영세 상인들의 상가 임대권 보호를 목적으로 제정된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임대료가 천정부지로 뛴 서울의 주요 상권에서는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점포가 거의 사라졌다. 퇴직금 등 목돈을 들여 창업을 한다 해도 수익을 낼 수 없는 상황이고, 어렵사리 창업을 한다 해도 법의 보호는 멀기만하다.
상가 투자정보 업체인 에프알인베스트먼트가 최근 서울시내 67개 주요 상권에 위치한 1층 점포 5206개의 임대료를 조사한 결과 전체의 73.7%인 3838개가 상가 임대차보호법 적용 범위를 웃도는 것으로 나타났다.
임대료 급등하면서 법 보호 받을 수 있는 점포 사라져
환산보증금 기준으로 3억원 이하인 상가 임대차 보호 대상 점포는 26.3%에 불과했다. 서울 주요상권의 점포 4곳 가운데 3곳이 임대차 보호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는 뜻이다.
명동과 인사동의 경우 임대차보호법 적용을 받는 점포가 아예 없었고, 강남구청역(1.8%), 압구정역(1.8%), 교대역(3.1%), 신사역(4.1%), 문정동로데오거리(4.8%), 종로관철동(6.9%), 강남역(8.0%), 신촌역(9.0%) 등은 그 비율이 10% 미만이었다.
조사대상 상권 가운데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점포 비율이 50% 이상인 곳은 중랑구의 동부시장(56.5%), 회기역 부근(50.6%), 마들역 인근(53.2%) 송파역 인근(56.6%) 등 4곳뿐이었다.
상가건물 임대차 보호법은 사회·경제적 약자인 상가건물 임차인의 권리를 보호하고 과도한 임대료 인상을 억제한다는 취지로 제정돼 2002년 시행됐다.
상가건물 임대료 인상률을 연간 12%로 제한하고 건물주가 임대계약 체결 5년 이내에는 임차인을 내쫓을 수 없도록 한 것이 골자다. 이후 2008년 시행령 개정을 통해 지금은 연간 임대료 인상률 제한폭이 9%로 줄었다.
그러나 최근 주요 상권의 임대료가 가파르게 뛰면서 실제로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대상이 크게 줄었다.
일각에서는 임대인들이 법 적용 대상에서 제외되기 위해 의도적으로 보증금을 줄이고 월세를 올리는 상황이 벌어진다는 지적도 있다.
법이 영세 자영업자를 보호하지 못한다는 비판과 함께, 조속히 법조항을 뜯어 고쳐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한누리창업연구소 박경환 소장은 "커피 전문점 등이 유행하면서 임대료가 많이 올랐다. 또 대기업 기업형 슈퍼마켓(SSM) 등이 상가에 들어서면서 임대료를 올리면 인근 상가의 임대료도 덩달아 뛰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고 전했다.
박 소장은 "임대료가 올라 창업을 하더라도 수익성을 확보하기 어렵고 법의 보호도 받지 못한다. 이제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은 임대료 구분없이 모든 점포에 적용되어야 하며, 임대료 인상 폭은 주택과 마찬가지로 연 5% 이내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목소리를 반영해 최근 상가 임대차보호법의 적용 범위를 확대하는 내용의 입법 추진이 잇따르고 있다.
민주통합당 박영선 의원과 진보정의당 서기호 의원은 국가, 지방자치단체, 대기업, 사행업종, 유흥업종 등을 제외한 모든 상가로 적용범위를 확대하는 내용의 법률안을 발의한 바 있다.
이노근 새누리당의원 등도 지난 달 계약갱신요구권 기간을 5년에서 7년으로 연장하고, 보증금 증액 한도를 연 9%에서 7%로 낮추는 내용을 골자로 한 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그러나 주요 상권을 장악한 부동산 업주들의 이익이 걸린 문제여서 법 개정을 둘러싸고 적지 않은 잡음과 진통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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